서예가 정난종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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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군포문화원 작성일20-07-01 09:19 조회1,58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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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군포시 속달로110번길25(속달동)
정의
조선전기 우참찬,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서예가.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진주목사사(賜)의 아들이다.
생애
1456년 생원·진사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대교·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좌부승지·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 오위장을 겸하였다. 1467년황해도관찰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469년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0년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호조참판·한성부판윤·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주문부사(奏聞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절도사·우참찬·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정난종은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특히 조맹부체(趙孟頫體)에 뛰어났다.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성종 대의 일류 서예가로, 1465년(세조 11, 乙酉)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을유자(乙酉字)이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정난종이 쓴 창덕궁 전문(殿門)들의 액(額)은 자체가 바르지 않다.”, “『원각경』의 자체가 고르지 않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적지 않다. 석문으로 서울파고다공원의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윤자운묘표」, 연산(連山)의 「김철산비(金鐵山碑)」가 있다.
또 금문으로 양양의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 고성의 「유점사종명(楡岾寺鐘銘)」, 양주의 「봉선사종명(奉先寺鐘銘)」, 덕수궁의 「흥천사종명(興天寺鐘銘)」이 있다. 진적은 보기 어려우며, 『동국명필(東國名筆)』·『해동명적(海東名跡)』·『대동서법(大東書法)』 등에 그의 글씨가 모각되어 있다. 시호는 익혜(翼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난종 [鄭蘭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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